낙서장

펌) “전철 타는 주제에 애는 왜 가져?”

울스 2011. 10. 28. 15:02

임신 7개월, 불러온 배를 안고 서울 지하철 3호선 상행선 전동차에 올랐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은 이미 만원.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꾸역꾸역 들어오는 승객에 밀려 손잡이도 잡을 수 없는 전동차 중간 통로에 한참을 서 있다가 '교통 약자 배려석'이 7석 마련돼 있다는 열차 마지막 칸으로 걸음을 옮겨보았다. 신문 보는 회사원, 팔짱 끼고 자는 학생,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청년…. 그곳도 이미 꽉 차 있었다.

퇴근길에는 자신이 임산부임을 표시해 공공장소 등에서 배려받으라며 보건복지부에서 나눠준 분홍색 엠블럼(가방 고리)을 달고 701번 파란색 버스를 타보았다. 운전석 뒤 다섯 번째 줄에 위치한 임산부 배려석이 눈에 띄었다. 진분홍색 덮개가 씌워져 있고 뱃속에 하트를 품고 있는 그림과 함께 "임산부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세요"라고 적힌 스티커가 옆에 붙어 있는 그 의자에는 4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이미 앉아 있었다. 앞에 선 기자의 배와 얼굴을 한 번씩 흘끗 보더니 그는 이내 눈을 감았다. 열 정류장을 지날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옆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분홍색 임산부 엠블럼이 민망해 슬그머니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지난 10월10일 임산부의 날 출퇴근 모습이었다.

 

시사IN 조우혜 임신부 방주미씨가 '임산부의 날' 기념식장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대중교통에는 임산부를 위한 좌석이 마련돼 있다. 서울 지하철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는 2007년 12월부터 시범 운영하던 교통 약자 배려석을 2009년 2월부터는 전 전동차에 7석으로 확대 설치했다. 서울메트로 홍보팀 이종헌씨는 "이미 마련된 노약자석도 원래는 노인들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지만, 사회 분위기상 노인이 아닌 임산부·유아 동반 고객·장애인 등이 그곳에 앉기가 부담스럽다는 현실을 고려해 교통 약자 배려석을 따로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도 2008년 11월부터 전동차 한 량당 7석의 교통 약자 배려석을 설치하고 지난해 11월부터는 그 가운데 한 좌석을 '임신부 지정석'으로 따로 구분해 놓았다. 서울시도 2009년 9월부터 서울 시내버스에 임산부 전용 좌석을 만들기 시작해 2011년 10월 현재 7534대의 버스에 전용 좌석을 한 자리씩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버스·지하철에서 곤혹스러운 일을 겪는 임신부가 많다. 임신부들이 많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맘스홀릭' 등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겪은 봉변 경험담들이 올라온다. 대부분 자리 양보는커녕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욕을 먹었다거나, "임신해서 전철 타고 다닐 만큼 돈도 없으면서 애는 왜 가졌대?"와 같은 핀잔을 들었다는 둥 서러운 이야기들이다. 실제 지난 3월 한 60대 남성이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았다며 30대 임신부를 폭행해 입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올해 서울메트로 고객의 소리 인터넷 게시판에 접수된 민원 67건 가운데 30건도 "지하철에서 임신부가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으니 임산부 배려석을 강화해달라"는 내용이다.

지난 10월7일 임신 8개월째인 직장인 송 아무개씨는 퇴근길 서울 지하철 7호선에서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한 할아버지에게 'XX년'과 같은 험한 욕설을 들었다. "예전에는 배불러서도 밭 매고 일 다 했는데 노인들 앉아 있을 자리에 너무 당당하게 앉아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송씨는 "출산 휴가 전까지 계속 출퇴근을 해야 하는데 앞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너무 무서워 큰일이다"라고 말했다.

12월 출산 예정인 정미은씨(31)는 지난 9월 임신 후 처음으로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받았다. "배불러서 다른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 비키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닌가 신경 쓰여 늘 그러듯 출입문 앞에서 노선도 암기나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팔을 툭툭 치더니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며 양보해주더라." 정씨에게 자리를 양보해준 사람은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외국인 남성이었다. 정씨는 "그분에게 너무 고마우면서도 처음 양보해준 사람이 한국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우혜 위는 임산부 배려 엠블럼.

 

배가 부른 임신부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임신한 것이 티가 나지 않는 초기 임신부들에게 대중교통 이용은 더욱 고역이다. 한양대 교직원 김 아무개씨(29)는 임신 10주째에 들어선 지난 10월4일 출근길에 서울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가다가 속을 다 게워냈다. 6주째부터 시작된 심한 입덧 때문에 잠시 노약자석에 앉아 있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앞에 서서 지팡이를 휘두른 것이다. 배가 안 나왔으니 임신했다고 말하기도 난처해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난 김씨는 열차 진동에 따라 울렁이는 속을 참다가 결국 두 정거장 뒤에 급히 화장실로 뛰어가야 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에 따르면 유산의 80% 이상이 임신 12주 이내에 가장 많이 나타날 정도로 임신 초기는 산모와 태아의 건강에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학회는 "이 시기에 충분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외견상 특별히 구별되지 않는 초기 임신부를 위한 사회적인 배려가 절실하다"라고 밝혔다. 이를 고려해 보건복지부는 최근 임산부 엠블럼을 제작·배포해 초기 임산부도 쉽게 배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엠블럼은 정작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 직장 여성이 방문하기 힘든 평일 낮 보건소에서만 나눠준다.


오죽하면 임신부가 '전투 태교'에 나섰을까


지난 10월10일 보건복지부가 연 제6회 임산부의 날 기념식장 앞에서 1인 시위가 벌어졌다. 분홍색 립스틱·원피스·단화로 색깔을 맞춘 임신 9개월의 임신부 방주미씨(32)가 비슷한 색깔의 푯말을 들고 행사장 앞에 섰다. 회사에 연차를 내고 이런 '전투 태교'에 임했다는 방씨는 "한 달 전 한 임신부가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노인에게 꾸중을 듣고 울면서 내리는 장면을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이렇게 나섰다"라고 말했다.

방씨의 요구 사항은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더 눈에 띄게 도색해 달라는 것과, 매년 임산부의 날 형식적인 기념식 대신 걷기 대회 같이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할 수 있고 홍보 효과가 좋은 방식을 도입하라는 것이다. '저출산 극복 유공자'들에 대한 시상식 등으로 이뤄진 이날 임산부의 날 기념식에 들어간 예산은 6000여 만원. 방씨는 "정부가 이런 전시행정 대신 실질적으로 임산부들이 배려받을 수 있는 방안에 노력을 더 들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보건복지부 구강가족건강과 노옥균 사무관은 "지하철 좌석 도색은 보건복지부 외 부처와 협의가 필요하고 기념식 형식을 바꾸는 데도 검토가 더 필요하겠지만, 앞으로 최대한 임산부 배려 문화가 확산될 수 있도록 홍보에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변진경 기자 / alm242@sisain.co.kr